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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 이야기 통! 통!/남동사람들

만수동 후생농장과 길영희 교장



영희(吉瑛羲) 선생 하면 누구나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일명‘돌대가리 교장’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는 그 학교에서 우리나라 유일의 무감독 시험을 창안해 시행했다거나, 1960년 서울대 입시에서 지방 고등학교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전체 수석 입학자를 배출했 다거나 한 교육자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안북도 희천(熙川) 출생인 길 교장이 1938년, 여기 남동구 만수동에 땅 수만 평을 사들여 ‘후생농장(厚生農場)’을 건설함으로써 우리 인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고, 훗날 인천 교육은 물론 우리나라 중등교육의 방향을 제시한 대 교육자로서, 또 영원한 인천 인물로서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길영희 선생이 남동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1938년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건설하면서부터이다. 후생농장이라 함은“대중의 자유로운 생산·소비 활동을 통한 상공업의 장려와 도시 개조를 주장한 연암학파의‘이용후생(利用厚生)’에서 따온 명칭”으로 길영희 선생이 이곳 만수동에 말 그대로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하려는 뜻에서 세운 농장이다.

길영희 선생은 1900년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4년제 희천공립학교 와 평양고보를 거쳐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듬해 1919년 3월 1일 학생대표로 3·1운동에 가담하여 만세를 부르다 보안법 위반으로 피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고 1920년 2월 초에 출옥한다.

이때는 이미 경성의전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은 때로, 그는 이참에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는가, 아니면 주위의 만류대로 남아서 다른 일을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진다. 그렇게 수개월간 전국의 명산을 헤매며 고뇌하던 길영희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3년 가까이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며 자신의 진로를 모색한다.

결국 교육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길영희 선생은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24세의 나이로 5년제 배재고보 4학년에 편입한다. 그리고 1925년 3월 배재고등보통학교 제9회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으며 일본 광도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에 유학한다. 여기서“민족 교육의 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그의 이상을 풀어 나갈 미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농민학교’설립이었다. 광도고사 시절 길영희 선생은“몇몇 동지들이 힘을 합쳐 사설 농민학교를 세우는 것이 어떤가.  졸업 후 기존의 학교에 들어가서는 우리의 고귀한 이념을 실천하기 힘들 거야.”하는 말을 했다고 전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1925년 4년간의 사범학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길영희 선생은 3·1운동 전력 때문에 총독부로부터 공립학교 교사 취임을 거부당한다. 결국 사립학교이자 모교인 배재고보 교유(敎諭)로 임명되어 자신이 꿈꾸어 왔던 민족교육을 펼친다. 그러나 3개월 만에 다시 경신학교 역사 선생으로 옮겨간다. 선생은 여기서 비로소 교사로서의 지식과 열정을 다해 제자들을 교육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광도고사 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던 이상촌 건설의 꿈을 접을 수 없어 서울 성북동에다 5백 평 규모의 땅에 움막을 지어 놓고“학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게도 했던 것은 아마도 이상촌 건설의 실험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일본 유학시절부터“뜻을 같이한 동지들인 김문찬, 이호철, 김용완과 귀국하여 알게 된 윤성순, 박원선, 장기려, 전종휘 같은 사람들과 이상촌을 건설하여 농민들에게 농업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조국의 해방과 발전을 도모하려”는 길영희 선생이 마침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도산이 이루지 못한 이상촌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도산이 구상한 이상촌은“산과 강이 있고 지미(地味)가 비옥한 지점을 택하여서 2백 호 정도의 집단 부락을 세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이상촌을 염두에 두고 우선 농장이라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1935년 일차 함경남도 안변의 황무지를 사들여 과수원을 일군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고 좀 더 가까운 곳에 이상촌 후보지를 마련하고자 하던 중 새로운 후보지로 선정한 곳이 인천 남동구 만수동이었던 것이다.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이 새로 생기면서 부천군 남동면 만수리로 불리던 이 땅은 원래 억새풀이 잘 자라서 새말[草村]이라고도 불리었던 곳이다. 1940년 4월 1일부로 인천부에 편입된 이곳은 그때까지도 시내버스도 없이 자전거로만 왕래할 수 있는 농업지대였다. ”길영희 선생은 이곳 땅을 1938년부터 수만 평을 매입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연유로 이곳을 이상촌 후보지로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후생농장이란 1930년대 말에 창건한 우리 동지들의 뜻의 결정체로 30대 청년기에 각자가 배수이 진을 치기 시작했던, 말하자면 꿈의 실현이었다. 만년에는 길형(吉兄)도‘내 일생은 후생농장을 통해 큰 힘을 얻었고 그 힘이 곧 인중·제고를 육성하는 데 큰 힘을 주었소.’하면서 그때의 뜻을 되새기곤 하였다.”고 동지 이호철은 후일 회고했다.

1939년 경신학교를 사직한 길영희 선생은 11월부터 본격적인 농장 경영에 참여한다. 그리고 6년간 농군으로서 지내다가 광복과 함께 인천중학교 교장이 되고 후에 제물포고등학교 설립과 함께 초대 교장이 되어 이때부터 다시 교육 일선에서 국가 동량을 길러내게 된다.

길영희 선생은 1961년 정년퇴직 후 충남 둔리 가루실에 농민학교를 세워 만년을 보내다 1984년 영면하신다. 그는 평생을 농민 교육과 인재 육성에 바쳤다. 그것이 인천에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여기 만수동 후생농장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김윤식 | 시인·인천문협 회장
 ※ "남동문화" 5집(2010년)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