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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 탐방 통! 통!

소래철교 달리던 꼬마 열차



수인선(水仁線)은 1905년 경부선개통 이후 국내 제1의 무역항으로 군림하던 인천 경제가 침체 일로를 걷고 있는 것을 우려한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상권을 경기 내륙까지 확대시키기 위해 건설했다. 1935년 9월 23일 민간 철도 회사인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인천-수원간(총 52km)에 선로를 놓기 시작해 2년 뒤인 1937년 8월 6일에 완공했는데 철로의 폭은 경인선의 절반(76.2cm) 정도밖에 안 되는 협궤였다.

수인선은 17개의 정거장과 임시 정류장을 설치하고 수원~인천 간을 1시간 40분에 연결하였는데, 17개 정거장 가운데 10개소는 정식 정거장으로 역사(驛舍)를 건축하고, 역원을 배치했지만, 7개소의 임시 정류장에는 역사도, 역원도 두지 않았다. 개통 당시의 운행노선을 보면, 수원-고색-오목(임시)-어천(임시)-야목(임시)-빈정-일리-성두(임시)-원곡-신길(임시)-군자-소래-논현(임시)-남동-문학(임시)-송도-인천항 순이었다.

수인선 기차는 초창기부터 ‘꼬마 기차’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정겨운 이름과는 달리 식민지 경제 침탈을 수행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노선이었다. 소래, 남동, 군자 등지에서 생산한 소금을 인천으로 실어 나르는 한편 경기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송하기 위해 이미 건설되었던 수여선(수원-여주간)을 인천항까지 연결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인천하의 물동량은 크게 증가하여 1938년에는 수입액이 129,859,598원, 수출액이 214,740,541원에 달할 정도로 또렷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같은 성장세에 따라 개통 1년도 채 못 되어 수인선의 협궤를 광궤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가 총독부 관리들부터 제기 되기도 했다. 또한 수인성을 이용하는 화물과 여객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1940년경에 이르러서는 노선의 광궤화와 개량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사업들의 모임인 인천부세진흥회에서 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인선은 광복 직후 사철(私鐵)의 국유화 조치에 따라 철도청이 운영하게 됐다. 더불어 산업 구조의 개편과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그 이용도가 급속히 위축되었다. 쌀 수송도 필요 없게 된데 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이용객마저 급감해 1972년에 접어들면서 노선 정리 방침에 따라 수원~여부 구간의 폐지가 결정되었다.

광복 후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채 적자 규모가 연간 2억 1천만 원에 달하던 수여선은 결국 이 해 3월 31일 마지막운행을 끝으로 42년만에 폐지되었다. 또 이듬해인 1973년 7월 13일에는 수인선 구간 중 남인천~송도구간 5Km가 인천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어 수원~송도간 46.3Km로 영업구간이 축소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고속버스 등에 밀려 하루 이용객이 평균 60여 명에 그치고 결국 3년간 60여 억 원의 적자를 내던 중 1995년 12월 31일 운행 58년 4개월 만에 기나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날 오후, 마지막 운행을 한 열차는 2량(輛) 으로 길이가 10m 정도밖에 안 돼 버스와 부딪쳐‘ 기차’가 나자빠졌었다는 우스개 같은 옛 일화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는데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아쉬움 속에 철도의 발상지 영국처럼 열차를 보전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 후 인천 남부 지역의 급격한 인구 증가(주민 120만 명)와 남동공단의 5만여 근로자들의 통근 등 을 이유로 인천상의가 낸 전철 조기 건설 건의에 따라 정부는 인천-수원간 52.8km에 2008년까지 전철 복선을 건설한다고 발표하였으나 아직 완공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광복 후, 애초의 기능과는 달리 여객 수송이 주류를 이루었던 수인선! 소래, 논현 등 남동 지역 주민들의 주요한 교통수단이자 농산물을 실어 신흥동‘수인시장’에 내다팔았던 아낙네들의 생명선이었고, 인천으로 통학하던 ‘통학생’들의 추억이 어린 수인선이 곧 재개통된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조우성 |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 "남동문화" 5집(2010년)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