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블라인드 틈새로 한 줄기 햇살이 기어든다. 어둠속에서 그 빛은 턱없이 밝다. 빛살은 한 남자의 헝클어진 이마 위에 머무른다. 그것은 느리게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길게 누운 남자의 잠긴 두 눈을 스치듯 지나간다. 남자는 눈을 찡그린다. 그는 노곤하고 달콤한 잠결에 몸을 맡긴 채 뒤척인다. 가까스로 눈을 뜬다.

 몇 번이나 나눠서 잠들었던 지난밤의 꿈을 더듬으며 그는 한껏 몸을 움츠린다. 꿈들은 토막토막 분절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연상되지 않았다. 커다란 가방에 고물시계를 아무렇게나 집어넣기도 했고, 페인트 통을 방안에 둘러엎는 꿈이기도 했다. 꿈은 늘 그랬다. 아니, 꿈을 늘 꾸었다는 것이 아니라 꿈의 이야기는 언제나 분절된 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연속이거나 현란한 색채처럼 아침이면 뭉개져 있기 일쑤였다.

 그는 아직 덜 깬 잠의 꼬리에 매달려 간밤의 꿈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십 분을 더 끌었다. 그러다가 소파를 맞붙인 잠자리에서 일어나 실내등을 켜고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바늘은 어김없이 십오 분 전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발을 더듬는다. 분명 소파 밑에 있어야 할 슬리퍼가 보이지 않는다. R이 또 아무데나 벗어놨을 것이다. 서늘한 감촉의 회색 카펫 위에 맨 발로 올라선다.

 그는 벽 모서리에 붙어 있는 스포라이트형 조명 네 개를 벽을 향해 밝힌다. 간접조명의 미세한 불빛이 그리 넓지 않은 실내를 비춘다. 너무나 익숙한 일상의 것들이 드러난다. 검은 밤색에 가까운 핑크 빛 소파와 그 위에 뭉쳐 있는 녹색의 군용담요, 잠자리를 만드느라 배열이 흐트러진 탁자와 의자들, 한 쪽 벽면을 채운 CD와 술병들, 그 앞을 가리고 있는 조그만 커피 잔과 접시들, 어젯밤 그가 사용한 맥주 컵은 하얀 거품이 말라붙은 채 놓여 있다. 오른쪽으로는 싱크대가 놓여 있고, 그 맞은편에 화장실이 있다. 모서리가 꺾여 진 옆으로는 흰색 바탕의 벽에 커다란 판넬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여자는 나선형으로 엎드려 있는 옆모습을 광각렌즈로 찍어 클로즈업시킨 것이다. 아랫부분에 앙드레즈 케르테즈. 변형.40.1933라는 글자가 붉은 글씨로 씌어있다. 부끄러움과 추위때문에 떨고 있는 인상이다.

 오른쪽 벽에는 검은 천의 옷을 입은 늙은 여자가 무릎 위에 이마를 맞대고 한껏 몸을 오그린 채 앉아있는 판넬이 걸려 있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두려움이거나 절망인데 뭉크의 절규처럼 처절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조용히 사그러들 것 같은 따뜻한 인상이다. 검은색 톤을 주로 사용한 그림이지만 왠지 여백에서는 빛이 느껴진다. 사진 판넬은 몇 년 전에 카페에서 알게 된 사진작가가 선물한 것이고, 늙은 여자‘펭크’는 그가 잡지를 뒤적거리다 베낀 그림인데 만화를 전공한 친구가 어설프다고 다시 그려 준 그림이다.

 지금 그들의 소식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추억은 매일 되살아나 아침이면 그와 마주친다. 그것 말고도 카페 실내에는 벽면이 안 보일 정도로 크고 작은 판넬과 영화 포스터로 가득하다. 앞에서 이야기 한 두 개의 판넬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것들은 그의 취향이기보다는 R의 것이다.

 R은 웬일인지 빈 공간을 참지 못한다. 틈이라도 생기면 판넬이나 영화 포스터는 물론, 잡지에서 뜯어 낸 기사까지 덕지덕지 붙여 놓는다. 그의 원룸에 있는 냉장고와 가스렌지 옆에도 각종 메모지와 사진들로 가득하다. 허전해서 그래. R의 변명이다. R은 항상 그를 앞에 두고 외롭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말이다. 그는 R이 외롭기 때문에 덩달아 외로워진다.

 그때 R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평소 후줄근한 모습과는 달리 정장으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평소에 들지 않는 가방까지 옆구리에 낀 채 꽤 기분 좋은 표정이다.

“어제는 바빴던 모양이지? 집엘 다 못 들어오고 말이야.”

“시월의 마지막 밤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꽤 많았어.”

 그는 R을 슬쩍 넘겨다보며 무슨 약속이라도……하고 물어 보려다 그만둔다.

“어젯밤에 다 끝냈어. 이 가방 안에 원고 뭉치가 그득하다구 그러면 이해가 되겠지?”

 R은 불룩한 가방을 툭툭 치고 있다.

“아, 이거 대단한데, 그러면 네 시나리오가 영화가 된다는 말이지?”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턱없이 밝다고 생각한다.

“아직 속단할 단계는 아니야. 일단, 감독이 원고 검토를 끝냈으나 제작자를 만나서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

“아무튼 좋은 일이야.”

“아, 아니야 아직 기뻐할 입장이 못 돼.”

 R은 얼굴이 붉게 물들면서 황망히 손을 내젓는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마치 어린아이 울음을 닮은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글쎄, 나도 아까부터 저 소리를 듣고 뭘까 궁리중이야.”

“아하, 저 소리 말이야?”

“저건, 도둑고양이 소리지. 집 나간 고양이들이 숲 속을 헤매다가 개 박하를 뜯어먹고 흥얼대는 소리지.”

 그러나 R은 고양이 소리 따위는 뒷전이다.

“그보다도 돈이 필요해. 감독과 만나 밥이라도 먹으려면 이번엔 좀 두둑해야 할 거야.”

 그는 계산대에서 금고를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R에게 건넨다. R은 슬쩍 돈의 두께를 훑어 본 다음 뒷 주머니에 쑤셔 놓는다.

“난 가봐야 해.”

 R은 누가 붙잡기라도 하듯 말꼬리를 자르고 뛰어 나간다.

 사흘 전 R은 그가 있는 바텐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나도 안 변했어. 이 카페도 너도, 눅눅한 이 습기도 여전해.”

 R은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생수를 털어 마신다.

“난 형이 어디론가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들은 쌍둥이였다. 삼십분 시차,

“서양에서는 형이 동생을 안전하게 보내고 자기는 나중에 나온다고 생각한대”

 어렸을 때 R은 30분 늦게 나온 자신이 형이라고 많이 우겼던 것 같다.

 그는 오랜만에 나타난 R을 보자 반갑기도 하고, 아무튼 좀 어리둥절해 있었다.

“왜 그렇게 말하지?”

“우리가 다시 만난 게 그렇게 좋은 일일 수만은 없다는 뜻이지. 왜, 내가 다시 나타난 게 두려운가?”

“천만에.”

“표정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내가 떠나가서 실망한 거야?”

 커다란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들고 R이 그의 카페에 나타났을 때 그는 대학교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이 - 그들은 스스로 깡통주의자라고 지칭했다. - 채팅과 게임으로 날이 새는 줄 모르는 재미에 관한 이야기를 막연히 듣고 있었다.

 R이 떠난 후로 그는 카페 일도 시들해져 날마다 술을 조금씩 마셨다.
 R이 그렇게 떠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나. 그의 기억 속에 R은 찾으면 없거나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나 그는 R이 아주 떠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곧 후줄근한 모습으로 카페 문을 밀고 돌아오겠지. 그는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곤 했다. 열려진 틈 사이로 한 움큼의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그 즈음 카페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R이 여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소식을 직접 전해 준 사람은 D였다.

 R은 친구와 동업으로 홍대 앞에 광고 기획사를 차렸는데 동업하던 갑자기 친구가 발을 빼버리고 사라지자 임대료가 밀리기 시작했다. 사무실 집기를 이삿짐센터 트레일러에 집어넣고 여기저기 떠돌았다. 하루에 창고비로 만 삼천 원이 나가는 곳이었다. 짐을 카페로 갖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광고 기획사를 차린답시고 그에게 돈을 빌려 쓴 게 있었다. 육 개월도 안되어 빈손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여자는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만났다. R은 딱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주머니를 털어 아침 겸 점심으로 산 군 감자를 씹으며 휴게소 앞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노란색 어린이 보호차량을 몰고 온 여자가 앞 범퍼에 기대어 나른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혼자였다. R은 여자에게 다가가 노란색과 참 잘 어울린다고 했다. R은 이런 여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외로운 부분을 긁어 주면 되었다. 자신을 시나리오 작가라고 소개했다. 광고 카피 보다는 그쪽이 좀 나아보였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더니 여자는 대뜸 피아노 방 하나가 비어 있다고 말했다. 여자는 생각보다 센스가 있었다. 사실, 오늘부터 자야 할 곳이 걱정이긴 했다. 트레일러에 처박아 둔 짐이 하루에만 삼천 원씩 더해진다는 생각을 하면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녀의 제의는 꽤 솔깃했다. R은 5분도 안 되서 여자의 옆 좌석에 앉았다. 피아노 학원을 한다는 연상의 여자에게 달라붙어 시나리오를 쓴답시고 한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다. 딱 한 번 연락이 오긴 했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돈만 부쳐 달라고 했다. 그는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빼내 R에게 부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트러일러에 보관한 짐을 빼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R은 왜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한 걸까. 나는 R, 너 하나면 되는데. 그는 소식이 없는 R을 기다리며 날마다 반문했다.

 R은 커피냄새가 좋은데. 라고 말하며 머그잔을 꺼내 커피를 가득 붓고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일 년 만이었는데 R은 마치 아침에 나갔다가 방금 들어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정말 R일까 눈을 의심했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또 기습적으로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늘 이렇게 만나리라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그는 잠시 꿈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여자는?' 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는 R이 여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참았다.

 그는 R에게 원룸 열쇠를 건네주면서 먼저 원룸에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순순히 R이 손을 내밀었다.
 카페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R은 실내의 불을 모두 켜둔 채 잠들었다. 어둠 속에서 잠 못 드는 버릇은 여전하군. 그는 땀을 흘리고 잠들어 있는 R을 보자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동거 중이었던 여자는 어떻게하고 이렇게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는데 R은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새벽부터 걸어온 사람처럼 잠자리를 보자 푹 꺾어진 것 같았다. 그는 신발장 옆에 놓여 있는 가방을 옮기려다 가방이 의외로 무겁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업만큼 이승에서 짐을 만든다고 했던가. R은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큰 가방을 갖고 다닌다. R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갑갑하고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는지 마음이 동하는 대로 어디론가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하지만 R은 가방 하나 이외에 어떤 짐도 만들지 않았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생겼을 상처들이 무늬처럼 보인다. 그는 가방의 지퍼를 조금 열어 보았다. 옷가지들이 있고, 영화 비디오, 일러스트 사전, 낡은 노트 한 권이 보인다.

“만일 내 삶이 나쁜 스토리라면” 아마도 R이 써놓은 시나리오 같은데 앞장만 채워졌을 뿐 뒷장부터는 빈 공백이다.

 어느 날 사내는 은행으로 간다. 경비원은 말한다.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오세요."
"내일은 없어."
 사내는 경비원의 귀에 칼을 들이댔다.  "나는 돈이 필요해" 
 경비원의 손가락은 모니터를 가리킨다.                      
 
(허혜정의 만약 나의 삶이 나쁜 스토리라면 중에서)

 R은 은행털이 사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운이 없다고 생각한다.

 R이 눈을 뜬다. 그는 R에게 일어나 술이나 마시자고 손을 잡아끈다. 그는 카페에서 갖고 온 캔 맥주와 마른안주를 R앞에 늘어놓는다. R은 잠이 덜 깬 듯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는 R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묻는다. R이 등을 긁적이며 겨우 대답한다.

'몇 달 동안은 참 행복했어. 트럭 운전기사 노릇을 잠시 했지. 동업을 하다 튄 현곤이를 잡겠다는 생각에서였는데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내가 도로의 생리에 길들여지는 것을 느꼈어. 그동안 광고카피를 하겠다고 시간만 축내고 지낸 것이 후회스럽더라. 운전석에 고개를 파묻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이 오는 광경을 목격했지. 형 생각을 잠깐 했어. 언제나 멀리 떠나고 싶은 사람은 형이었는데 지금도 에이프런을 두르고 여전히 안주로 감자튀김을 만들고 있을까.'

“그럼, 피아노 학원 여자와의 동거는 소문이었단 말이지. 카페에서는 네가 돈 많은 여자를 만나 편안하게 글이나 쓰면서 등쳐먹는다는 소문이 무성했어. 물론 나는 믿지 않았지만”

“내게 그런 오해가 있었구나. 돈 많은 연상의 여자가 눈이 멀었냐. 나 같은 놈에게 걸리게”

 R이 사실대로 말해 주었더라면 그는 모든 걸 이해하려고 했다. 아직도 R은 그에게 숨기는 것이 많다. 왜 R은 여자에게 채였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걸까. 돈을 요구하다 생각보다 깐깐한 여자가 거부를 하니까 폭력을 행사해 경찰서 조서를 받고 나오는 즉시 피아노 학원을 나와 버렸다고 고백하면 될 텐데. 하지만 그는 상관없다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형, 나 이번에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 했어.”

 R은 열심히 무언가 하기는 한다. 되는 일이 없어서 그렇지만. R식으로 말한다면 삶은 나쁜 스토리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장거리를 뛰고 덤프트럭에 앉아 빵을 뜯어 먹고 있는데 형이 환장하게 보고 싶은 거야. 당장 달려가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었어. 이상도 하지. 나는 여느 때 보다 빨리 형에게 달려 갈 수 있었는데 꼼짝 할 수 없었어. 정작 되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트럭운전이나 하는 나를 형이 어떻게 생각할까. 난, 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어. 그런 형을 실망시킬 수 없던 거야. 난 형이 두려워. 부러워. 나도 형처럼 한 곳에 머물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습관처럼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시계 바늘은 열두시 오 분에 멎어 있다. 늘 똑같은 길이로 반복하는 추 역시 정지되어 있다. 어제 시계 밥 주는 것을 잊었던가. 그는 의자를 올려놓고 올라서서 뚜껑을 연다. 손을 움직여 태엽을 감아준다. 그는 지금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엽을 감던 R이 떠오른다. 뒤꿈치를 세운 R의 모습, 그는 R의 그런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R은 쌍둥이라는 것이 창피해서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R은 그가 곁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R은 그와 똑같다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피해 다녔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R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R을 쳐다 볼 수 있었다.

 그는 태엽을 감은 뒤 멈추어 있는 추를 가만히 건드려 본다. 잠이 든 추는 그때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똑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안의 것들이 하나 둘씩 살아나기 시작한다.

 '지금쯤 R은 감독을 만나고 있을까.'

 그는 카운터 안쪽에 턱을 괴고 앉아 단조로운 재즈음악에 몸을 맡긴 채 있었다. 저녁 시간을 막 넘긴 때라 홀 안에 손님이라곤 연극을 한다고 했지만 매표소에서 표를 팔 때가 더 많은 S와, 카페의 라커이면서 가끔씩 서빙도 도와주고 있는 D가 전부였다. 그는 메모지를 끌어다가 답답해, 이제 나도 이곳이 지겨워. 라고 썼다가 이제 R이 시나리오 작가가 된다. 라고 써보았다. 그것은 R이 카페 주인이 된다거나, 비디오가게 주인이 된다는 것과 다른 의미다.

 R은 아니라고 했지만 며칠 전부터 은근히 소식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직감적으로 그는 R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카페에 나와 있으면 무수히 걸려오는 전화 속에서 R의 것을 구별할 수 있었다.

“감독에게 보였더니 시놉이 너무 좋대. 스필버그와 견 줄만 하다나, 난, 확 터져버릴 것 같아.”

 그는 문득, 어둠 속에서 나무뿌리를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R과는 달리, 그는 가슴 한쪽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말은 다르게 튀어 나왔다.

“그럴 줄 알았어. 한 번쯤은 좋은 소식이 올 줄 알았다니까.”

 R이 시나리오가 감독의 눈에 든 것이 너무 기뻐 지나가는 사람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고 싶다고 전화 속에서 외쳤을 때. 그는 R이 곧 그의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R의 꿈은 빨리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눅눅한 이 지하 카페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R이 저녁에 카페에 들렀는데 자신이 없어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니던 옛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맥주를 병째로 들이키며 홀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니던 R이 한 마디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이 조용하지?”

 R은 자신이 작가가 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요란을 떨며 몰려 올 줄 알았나보다.

“급하긴, 아직 네 시나리오가 영화로 나온 것은 아니잖아.”

 그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R이 좋아 했던 시간은 잠시였다. 몇 몇 친구들이 모여 축하 파티를 카페에서 했는데 새벽까지 R은 절친했던 D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D는 락 성향에 약간 허스키한 자신의 목소리가 어느 무대에서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고대하는 사람이었다.

“형은 좋겠어. 이제 미친 듯이 쓰기만 하면 되겠네.”

 R은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술좌석이 흐뭇하기도 하고, 난생 처음 자신이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 있었다. 술이 들어가자 기분은 상승세를 타고 끊어진 연처럼 자꾸 허공 속에서 너울대고 있었다.

“앞으로 내 영화가 나오고, 그러면 상상의 물줄기가 말라 거의 뇌사 상태에 빠진 영화판을 확 뒤엎고 말거야.”

“뭘로?”

“형이 가지고 있는 삽으로는 어림도 없지. 적어도 포크레인 쯤 되어야 …….”

“너 이 새끼.”

 R의 손에 있던 술잔이 날아가고 술잔은 D의 머리를 약간 스쳐 벽에 부딪쳐 박살났다.

 그는 바텐에서 술을 마시는 척 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왜들 이래, 무슨 일이냐 구?”

 그는 D를 보며 먼저 물었다.

“농담 좀 했어요. 오늘은 되게 안 먹히네.”

“너 임마, 영화 한 판 못 찍은 시나리오 작가가 우습다는 거지? 며칠 전 내가 준 시나리오 원고 피아노 의자 밑에 깔려 있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지?”

“그건, 형 오해야. 기회가 있으면 읽으려고 잘 보관해 둔거라구?”

 그는 D가 변명을 하느라 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R은 쓸데없이 예민해져 있었다. R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R은 한 달 전에 갖다 준 원고가 궁금해서 가보았다. 감독은 마침 놀러온 다른 감독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매번 영화 제작 중이라 바쁘다고 만나주지도 않더니 한가하게 바둑을 두고 있다는 것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R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감독은 느린 걸음으로 책상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맨 밑에 깔려 있는 원고를 꺼냈다. 낮술을 벌써부터 두어 잔 걸친 탓에 붉게 물든 감독의 얼굴이 R앞에서 흔들거렸다. 한 참을 실눈을 뜨고 읽어보더니 감독의 입에서 한 숨이 새어 나왔다. R의 시놉을 보고 영화 홍보를 위해서 막 내한한 미국의 영화감독 스필버그에게 보여주겠다고 상상력 어쩌구 하며 너스레를 떨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제작회의에 붙이기 전에 시나리오를 고쳐 보도록 하지. 이 시놉 대로라면 영화를 찍는데 곤란해. 무슨 판타지 영화도 아닌데 공상적 요소가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 감독은(이제 생각해 보니 그가 감독이라는 것도 광고 카피를 하고 있는 선배의 소개 때문이었지, 그가 어떤 영화를 찍었고, 영화판에서 정말 유명한 감독인지 몰랐다는 게 신기했다.) 그때엔 대충 읽어 보았기 때문에 몰랐지만 꼼꼼히 읽어보니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개연성이 부족해. 영화로 찍기에는 무리가 있어.”

 감독은 R이 변명의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돌아섰다. 계단을 내려서려는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화가 뜬다니까 하루에도 저런 실없는 친구들이 얼마나 몰려드는지 정신이 없어. 다들 시나리오를 쓴다고들 난리야."

 바둑알을 때리는 음이 R의 머리를 텅텅 울리고 있었다.
 R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 군데의 술집을 들렀다. 조금씩 마시기 시작한 술로 집에 다 왔을 무렵 어느 정도 취해 있었지만 R의 손에는 소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클클 거리며 웃던 영화감독의 웃음소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R은 영화감독에게 되돌려 받은 시나리오를 주머니에서 꺼내 찢어 날려 버렸다. 마치 그 원고가 영화감독의 얼굴이라도 된 듯 말이다.

 술병이 바닥을 드러내자 R은 비틀비틀 걸어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걸을 때 마다 발이 자꾸 엉키는 것을 보니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편의점에서 술을 사가지고 오는 길에 카페에서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그를 만났다.

“으흥, 너는 항상 내가 안 좋은 길목에서 나를 기다리지. 그렇게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너도 D와 영화감독처럼 나를 비웃고 있을걸. 말해봐.”

 R은 그까지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R이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아무도 못 믿겠다고 소리를 쳤기 때문에 그는 난감했다. R은 이제는 영화 따위는 집어치우고 트럭운전기사가 되겠다고 했다.

 밤새도록 R은 술을 토해냈고 토한 것을 치우지도 못하게 했다. 그를 밖으로 나가게 한 다음 문을 잠그고 맨 손으로 토한 것을 치우는 것을 문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그는 R이 자기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 밖에서 R의 행동을 보고 몸을 떨었다.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니?'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너는 취중에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아.'

“필름이 끊어진다는 말 이해 할 수 있어?”

 오후 늦게 잠자리에서 깨어난 R에게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R은 자신 속에서 걸어 나온 어제의 기억이 낯설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늘 내면으로 기어 들어가 어둠 속에서 영사기를 돌리듯 스크린에 나타난 기억의 그림자를 반추하는 그와는 달리 R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었다.

“감독과 무슨 일이 있었어?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야?”

 R은 대답 대신 식탁에 놓인 음식을 게걸스럽게 집어 먹었다. R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R이 외롭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날 밤, R은 잠자리에 누워 방의 구조가 정확히 자신을 이등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실과 방 사이를 잇는 문지방에 이불을 깔 수밖에 없었다. 둘이 눕기에는 그의 원룸은 너무 작았다.

“내가 토막 난 느낌이야. 나를 느낄 수가 없어. 만약에 내 삶이 나쁜 스토리라면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좋은 스토리는 아닌 것 같아.”

 그는 아무 말도 못했다. R을 보면 나쁜 스토리까지는 몰라도 스토리를 나쁜 쪽으로 몰고 가는 생각이나 습관은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너 알지? D말이야. 그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안치환이나, 장필순의 노래를 부르면 카페 안에 박수 소리가 굉장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D는 내 작품을 이해한다고 믿었는데 내 시나리오를 피아노 밑에 꿍쳐났더라. 그때 깔린 것은 작품이 아니라 내 자존심이었어.”

"아, 답답해. 질렸어." R은 언젠가 그가 중얼거린 말을 흉내 냈다.

“떠날 거야. 트럭이나 몰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의 몸속에 힘겹게 반추하던 추가 쿵하고 떨어졌다. 그동안 R이 조용히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길래 웬일인가 했었다.

“아버지 사고 소식을 들었던 날, R 너는 친구 집에 있었고, 어머니는 한사코 가지 않으려고 해서 나 혼자 사고 현장으로 갔었잖아. 거의 사고 현장이 수습된 상태였는데 나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 현기증이 났지만 비가 줄줄 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나는 모든 걸 기억하겠다는 듯이 꼼꼼히 바라보았지. 아버지는 사고차량을 견인하려고 달려가다가 역주행 차량, 그 차는 횟집에 고기를 대는 활어차였대. 운전기사는 삼십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술을 마신 뒤 순간적인 제어능력을 상실해 사고를 일으켰다고 했어. 어쩌면 아버지 생애에 가장 먼저 달려 갈 수 있었던 순간이었는데, 아버진 다른 렉커 운전사 보다 한 발 늦게 도착해서 일거리를 빼앗긴 적이 많았잖아. 어이없게도 역주행으로 거슬러 오는 활어차에 의해 아버지는 생을 마감해야 했어.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가 피에 굶주린 하이에나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하이에나처럼 피 냄새를 맡고 도로를 질주하던 아버지가 그렇게 싫었는데 박살나 버린 아버지의 차를 보는 순간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어. 아버지의 견인차가 다른 견인차에 의해 견인되는 것을 보았어."

 그의 귀에는 아직도 사이렌소리가 웅웅거렸다. 아버지가 사고차량을 발견하고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가 말했다. "트럭은 안 돼. 너무 강하게 말했기 때문에 그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처럼 되는 거 싫어. 그냥 내 곁에 있어주면 되는데, 네가 무엇을 하든 나는 R, 너 하나면 족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그러나 R은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재빠르게 말했다.

“나 더러 이 눅눅한 카페에서 살란 말이지? 나는 이 어둠이 싫어.”

“돈을 많이 벌어 형을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내 시나리오가 한 방 터지면 형도 이 더럽고 눅눅한 지하 카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R은 왜 이곳을 더럽고 눅눅한 곳이라고 함부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싱크대 위에 있는 설거지들을 해치우기 시작한다. 그의 동작은 서두르거나 느긋하지 않다. 그저 몸에 밴 습관처럼 움직인다. 그는 커피 잔 하나를 들어 올린다. R의 입술자국이 묻어 있다. 축제가 끝 난 뒤처럼 황량하고 쓸쓸하기조차 한다. 사람들은 시월의 마지막 밤에는 기를 쓰고 무슨 추억거리라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카페로 몰려든다. 어제도 카페 문을 막 열려는 시각에 홀 서빙을 하는 아르바이트생이 할머니가 응급실에 와 있다며 전화 한통화로 끝이었다. 이런 날이면 그도 여자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기 위해 다른 카페에 손님으로 앉아 있고 싶을 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는 쟁반을 들고 홀 서빙까지 해야했다.

 수도꼭지를 틀자 쏟아지는 물이 섬뜩하게 차갑다. 가을이 깊어가는 모양이다. 그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의 느낌으로 계절을 실감한다. 그는 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지하 카페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 밖으로 나갈 이유가 점차로 줄어든다. 카페에서 십분 거리인 원룸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고작이다. 도대체 나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술이나, 야채, 마른안주 따위는 매일 들르는 진미 아저씨가 날라 오고, 그를 만나려고 하는 친구는 해마다 줄어든다. 문득, 보고 싶어 미치도록 달려 갈 친구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R이면 족한 것이다. 그러나 R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일이 안 풀리거나 힘들 때 찾아오는 정거장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설거지를 끝내고서 원두커피를 갈고 커피를 여과지에 걸러 뽑아냈다. 실내 가득 원두커피의 향이 진하게 배어든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유리창을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 셈이다. 그는 갓 뽑은 커피를 머그잔에 가득 채운 뒤 CD를 집어넣는다. '너는 삶을 바꾸길 원하지? 어떤 삶을 원해?' 라디오 헤드의 <클립>의 일절이다.

"내가 조금만 더 잘났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난 어쩔 수 없는 바보 같은 존재야. 나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어."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네 생각을 바꿔봐. 노력해서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어. 쌉싸름한 커피의 향이 부드럽게 그를 어루만진다.

 그는 자신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신의 꿈이 뭐였던가 생각해 본다. 중학생이었을 때는 심야영화를 보며, 혹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관을 기웃거리며 영화감독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비디오 가게 주인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대학에 가서는 락에 빠져 드럼주자가 되기로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다. 그 후로는 어땠는가.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카페에서 끝내 발을 빼지 못하고 카페 주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이것이 꿈의 정체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고,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떨쳐나서기에는 재즈카페에 벌여 놓은 짐들이, 혹은 보잘 것 없는 그의 추억들이 발목을 죄고 있다. R은 아직 연락이 없다. 그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R, 너 임마, 나라고 항상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냐…옹, 역시 고양이었어. 그는 집을 나간 들 고양이처럼 부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다가, 듣고 싶은 음악이 생각나 레코드 가게로 뛰어가는 도중에 문득…, 그렇게 문득, 감쪽같이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그는 탁자를 더듬어 매직펜과 종이를 꺼내어 큼지막한 글씨로‘임시휴업 내부 수리 중’이라고 썼다가 구겨버리고 다시 종이를 꺼내어 ‘임대’라고 써 본다.

'R, 나도 너처럼 떠날 수 있어. 나라고 이렇게 지하에 처박혀 살고 싶었겠니. 너만 못해서 내가 이곳을 못 떠난 줄 알아. 네가 야금야금 가져 간 대출금만 아니었대도 나는 벌써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 거야. 넌 한 번도 네게 건너가는 돈이 어떤 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니? 생각해 보고 싶지 않았을 거야. 넌 한 번도 돈을 가져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언젠가 네 말대로 한 방 터지면 인심 쓰듯 갚을 돈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는 에이프런을 입고, 탁자를 훔치며 장사를 또 시작할 것이다. 그는 떠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카페 전체가 되었으므로, 그래서 떠난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오후가 빨리 저물어 간다. 날씨가 음산한 편이므로 오늘은 손님이 일찍 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날이면 사람들은 외로운 얼굴들을 하고 땅속 깊은 그의 카페 안으로 박쥐처럼 기어들 것이다. 그는 자신이 카페 손님들을 상대로 날마다 똑같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커피를 뽑고, 술을 따르고, 안주로 감자튀김을 만들고, 브이 채널을 틀어 놓고 담배연기를 내 뿜으면서 헛헛한 웃음을 날리고, 얼굴을 다 외우다시피한 손님들과 음담패설을 나누다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오늘도 내일도 변하지 않는다. 27일 목요일, 28일 목요일, 29일 목요일, 30일 솟구치는 바다.

 그는 카페 간판에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한다. 일찍 어두워진 저녁은 유난히 길을 잃어버리는 편이지. 문이 열리고 연극을 하고 있는 S가 들어선다. 
"눈이 오려나 봐요. 날씨가 음산한데요. 바람이 불고 있어요."

“바람이 불고 있다구?”

 그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이런 날엔 관객이 줄어들죠. 사람들은 이런 저녁이면 아예 카페에 틀어박혀 바람소리를 듣거나, 바람처럼 미친 듯이 거리를 쓸고 다니거나 둘 중의 하나죠. 생각해 보세요. 바람 불고 눈 오는 날 컴컴한 소극장 안에 꼼짝 않고 앉아 있을 수가 있겠어요?”

 바람과 연극,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그는 얼마든지 연극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 오고, 바람 부는 날 연극을 보러 간 특별한 기억은 없다.

 문이 열리면서 R이 후줄근하게 젖은 채로 들어온다. 쥐어짜면 물이 주루룩 흘러내릴 것 같은 몰골이 흡사 유령 같다. 그는 수건을 건넨다. 불룩한 가방이 배꼽 밑으로 축 늘어져 있다.

“갔던 일은 잘 된 모양이지? 이렇게 늦게 들어 온 것을 보면, 영화 찍을 수 있는 거야? 드디어 네 시나리오가 영화로 나온다는 거야?”

“아… 그거……? 참, 아까 화단을 들러보니 고양이는 보이지 않던데, 빈 화단이었어.”

 R은 애써 대답을 피하는 눈치다.

“아니, 제대로 못 본 모양이지. 개 박하 먹고 발정난 고양이들이 화단을 얼마나 쑤시고 다니는지 관리인이 골치가 다 아프다고 하던데?”

“그럴 리가?”

“그건 그렇고 영화는 찍는 거야?”

“기다려야지. 내겐 시간이 많으니까.”

 침대로 기어 올라간 R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왜 이렇게 피곤한 거지? 몸이 왜 이렇게 무거운거지? 중얼거린다.

 R이 아무렇게나 내던 진 가방에서 물에 반쯤 젖어있는 시나리오가 보인다.

 벽시계가 여섯 시에 멈춰 있다. 그는 태엽을 감아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R의 등을 어루만지며, 블라인드의 틈을 조금 벌려 놓는다.

 내일 아침에도 햇빛이 R을 깨울 수 있도록 어둠 속에 잠이 든 R이 혼곤한 꿈속에서 자꾸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R이 잠든 벽의 마지막 실내등을 끈다.    

<THE END>

글 : 홍영애 (소설가) 
※  "남동문화 제6호(2011년)"에 게재된 글입니다.

Posted by 남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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