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나는 돌우물 ‘석천(石泉)’
아무튼 급자기 낯선 환경에서 처량한 삶을 살자니 나날이 몸은 고단하고 마음 또한 울적하기 그지없을 때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아파트 정문 앞이 석천사거리로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큰애를 바로 옆의 석천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였다. 석천이라면 그것이‘石泉’인지 혹은‘石川’인지 궁금했는데, 일단 내가 사는 주공아파트 단지 북쪽 축대 아래에(지금은 복개가 되어 볼 수 없다) 긴 내처럼 생긴 수로 형태의 물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내 딴에는‘川’으로 판단해 버리고 말았다.
행정구역은 남구이지만 근처에 석바위가 있고, 또 간석동 같은 동명과 석촌마을이니 하는 것으로 보아 막연하나마 이 일대가 돌과 관련한 지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천 토박이여서 경인도로변에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며 서 있던‘석바위’를 수차 보았으니 이 지역의 돌과 연관성이 얼른 떠오를 수는 있는 일이었다.
‘석천’이 꼭 궁금했다기보다 무료하고 답답한 실업(失業)의 생활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했던 일이었다. 매일 집에서 멀리 중구 율목동 옛 인천시립도서관으로 가서 인천사(仁川史)나 향토지지(鄕土地誌) 같은 것을 찾아보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속 시원히 나와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몇 해 더 찌그러진 살림을 하다가 어찌어찌 좀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내친 김에 인천역사 공부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매일 시립도 서관에 나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찾고 읽어대다가 실로 우연히 ‘부평 온정(溫井)’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왕조실록에 있는 이야기로서 그때까지 인천 부평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터라 아주 흥미로웠다.
이야기는 세종 임금이 부평에서 온천을 찾느라고 고심했던 내용으로 온천탐색에 실패한 노여움이 마침내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킨 일화였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한쪽다리가 불편했고, 등에는 부스럼이 있는 데다가 시력까지 약했다. 이에 대신들이 온천욕을 권유했고, 그 말대로 온양온천에 가서 목욕을 한 후 효험을 본 것이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반일(半日) 거리의 부평에 온수가 난다는 말을 듣고는 즉각 탐색을 명했는데, 특히 부평은 도성과 가까워 거둥이 편리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온천 탐색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세종은 그것을 부평의 관민들이 민폐를 두려워하여(세종이 거둥하면 그 치다꺼리가 귀찮아) 고의로 숨겨 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임금의 기휘에 저촉된 사건이었다.”
그 내용을 좀 더 읽어보자. “부평부(富平府)를 강등하여 현(懸)으로 하였다. 임금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번 조관(朝官)을 보내어 찾아보았으나,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므로 깎아 내려서 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실제 온천이 있다는 장소는 처음부터 정확한 기록이 없어 수차에 걸쳐 많은 인력이 ‘부평현 관사, 향리(鄕吏)의 집, 민가, 전원에 이르기까지 파지 않은 곳이 없을’정도로 갈팡질팡했으며, 동시에 ‘온정 터를 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전과 백성이 잡혀 고문을 당하고’그에 관련하여 함경도 변방으로 쫓겨난 자도 상당 할 만큼 근 5년 가까이나 부평 일대를 들쑤셨다.”는 것이다.
이 소동은 결국 온천 발견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세종이 8년 만에 다시 도호부로 환원시키면서 종결된다. 이후 세조 때 또 한 차례 부평부 남급(南級)의 집에 온천이 있다 하여 신숙주(申叔舟) 등을 보내 살피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까지는 부평이야기인데 그 뒤에 짤막한 석천 약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때까지 ‘石川’으로 생각하고 있던 오류를 ‘石泉’으로 바로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종실록 26년 6월 10일(음력) 기록으로 분명“돌 가운데 샘”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보이는 기록은 이것이 전부여서 그 후 샘물에 대해 조사한 결과가 어떠했는지 하회(下回)는 알 길이 없다.
인천시청 후문에서 간석동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바로 석천사거리가 나온다. 구월동과 간석동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주변에 석천초등학교도 자리를 잡고 있다. ‘석천(石泉)’이란 글자 그대로 ‘돌샘’또는‘돌우물’이라는 뜻인데, 옛날 이곳에 향기가 나는 돌우물이 있었고, 이 때문에 돌샘마을이라 불렸던 동네가 있었다는 전설에서 붙게 된 이름이다. 이 돌우물은 지금 만월산이라고 불리고 있는 주안산의 서쪽 기슭에 있었다고 하니 대략 지금의 석천사거리 부근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 실제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남동 이야기 통! 통! > 남동 문학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시멜로 이야기』를 읽고... (0) | 2012.01.11 |
---|---|
『몰입』을 읽고... (0) | 2012.01.11 |
아찔한 액땜 ... <수필> (0) | 2012.01.11 |
『모모』를 읽고... (0) | 2012.01.10 |
블라인드 ... <단편소설> (0) | 2012.01.07 |
돌우물 ‘석천(石泉)’ ... <수필> (0) | 2012.01.05 |
중국 소회(所懷) ... <수필> (0) | 2011.12.29 |
나의 공직 뒤안길 ... <수필> (0) | 2011.12.29 |
酒遊天下 ... <수필> (0) | 2011.12.29 |
사랑해! 아우야 ... <시> (0) | 2011.12.29 |
향기로운 여인 ... <시> (0) | 2011.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