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직 뒤안길
 

정신없이 달려온 경인년(庚寅年) 한해가 어느덧 저물어 가고 있다.

겨울나무 마다 마지막 잎사귀 하나씩 달고 애처로운 듯 바람을 원망하고 있는 듯하다. 평소에 공직에 대한 희망과 정의에 불타는 진정한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1988년 4월 18일자로 인천지방공무원으로서 임용되어 어언 22년이란 길고도 짧은 세월이 쏜살처럼 흘렀다. 지난 세월을 회고(回顧)하는 의미에서 잠시 추억에 빠져 보고자 한다.

나의 첫 발령 근무지는 인천시 남구 총무국 민방위과에서 교육 훈련업무를 맡다가 인사발령으로 직원 이동에 따라 서무 업무를 맡았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고 모든 문서 작성이나 기안(起案), 기획 업무를 수기(手記)로 작성해야 했다. 각종 보고서도 수기로 작성 보고했기 때문에 글씨 잘 쓰는 공무원이 정말 우대(優待)받는 시절이었다.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지금의 서구 심곡동에 있는 인천광역시지방공무원교육원, 현재 인천광역시인재개발원에서 공무원신규임용후보자과정의 교육을 4주간의 이수하고 현지 근무지를 배정받았다. 처음법규나 규정, 업무편람 등에 없는 관행적(慣行的)으로 이루어지는 업무가 많아 모르는 것은 염치불구하고 전임자나 선배 공무원에게 물어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무원 임용된 지 1년 6개월이 되어서 8급으로 승진하여 1989년10월에 주안6동 동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동사무소 근무는 처음이라 모르는 업무도 많았고 직원도 낯설어 서먹한 분위기였다. 한두 달근무하니 동 현황도 알고 직원도 알게되어 선배들이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때 동사무소에는 수도료, 전기료, TV시청료 등의 통합공과금, 건설·건축, 청소료 업무 등으로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직원은 20여명 정도였다.

나의 업무는 인감 업무(印鑑業務) 등 민원 업무를 맡았다. 인감 제도가 바뀌고 주민 전산화되는 단계라 신규 인감증명서 카드도 만들고 인감증명도 발급했다. 동료 직원의 도움 없이 혼자 처리하기에는 많은 애로(隘路)가 있었는데 다행히 동료 직원이 도와줘 큰 무리 없이 잘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동장은 일반직이 아니고 별정직인 ‘남무교’님이셨다. 동장 님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동장 님은 모든 직원들에게 잘 하셨고 가족과 함께 하는송년회(送年會)를 개최하기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그때 일을 자주회상(回想)하며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의 근황을 물어온다. 그때의 좋은 추억을 지금도 간직하고 싶어서 주안6동 모임 일명‘밀물회’라는 친목회를 만들어 자주 만나 소주잔을 기울인다.

주안6동사무소에서 2년 3개월을 근무하고 1992년 2월에 남구 총무국 총무과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업무는 체육청소년계에 체육시설업 업무를 맡아 골프연습장, 당구장, 탁구장, 체육관 등의 체육시설업 신고 수리하는 업무였다. 당시에는 당구장에는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그 후에 체육시설업으로 분류되면서 출입이 허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비중이 있는 구민의 날 체육 대회 행사 개최 업무를 담당했지만 지원과 함께 옆에서 지켜본 것이 행사 개최에 대한 조금의 노하우를 습득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1992년 11월에 숭의1동 사무소로 7급으로 승진하여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제는 공무원 경력이 있어 조금은 행정의 흐름도 알게 되었고, 후배 직원들도 리더를 하여 업무 추진이 원활히 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는 위치였다. 맡은 업무는 회계 및 일반서무였다. 주민의 긴급한 소규모 편의를 위한 공사 예산인 동장 포괄 사업비도 있었고, 적십자특별회비도 직접 관내 주요 업체, 이름이 알려져 있는 숭의동 공구 상가를 순회하며 수금하기도 했다.

얼마 후에 인천시 전입 시험이 있어 응시하였고 1994년 3월 인천광역시로 전입되어 인천지하철건설본부에 근무 인사 발령을 받았다. 건축과 서무, 관리과 보상, 재무과, 지하철공사를 설립하는 운영기획단 등에서 4년 3개월을 근무했다. 인천지하철1호선 건설을 위한 보상업무를 구간별로 맡아서 했고 지하철보상은 지하의 일정한 구간만을 보상하는 구분지상권을 설정하는 보상으로 인천에서는 최초의 보상업무라 보상조례 제정과 보상 협의 등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1년 내에 건설교통부에 수용재결을 신청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이라 휴일에도 많은 근무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인천지하철 운영기관인 인천지하철공사 설립 업무를 하면서 공사로 전출을 희망하고 설립조례, 정관, 사규 등 제정과 기술교관요원 22명을 우선선발을 위한 타 시도 서울, 부산, 대구 등으로 벤치마킹의 출장도 많이 갔던 기억이 있다. 공사 직원으로 전환할 경우 약간의 프리미엄인 공사3급(평상시 행정7급 → 공사 4급)으로 전출이 가능했었다. 어느덧 행정7급 선임으로 6급 승진이 순위 내에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지하철공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된 것과 나 자신이 조금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느낌도 있었다. 아내의 반대에 지하철공사로 전환하지 않고 계속 지방직공무원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었다.

1998년 6월에 인천광역시 문화관광국 관광진흥과에 발령받아 서무 업무를 맡아 보게 되었다. 시(市) 사업소에 근무하다가 시 본청에 근무하는 것이 처음이라 약간은 두려웠다. 두 분 과장과 한 분의 국장을 보필하는 자리였다. 곧 6급으로 승진하는 영광을 얻게 되어 주위의 축하와 함께 기쁨이 정말 컸었다. 여성복지관 관리팀장으로 발령받아 많은 여성과 같이 일하게 되어 여성의 섬세함과 다정스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복지관에서 10개월 정도 근무하고 2001년 1월에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에 파견 근무를 지원하여 근무하게 되었다. 인천운영본부 문학경기장에서 근무하면서 대회 전반에 대하여 운영하는 임무였다. 선발대로 파견근무(派遣勤務)하는 관계로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 및 업무연찬과 함께 2001년도 수원에서 개최되는 2002년 한·일월드컵대회 전에 개최하는 컨페드레이션컵대회 주관을 위하여 한동안은 수원운영본부로 출. 퇴근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때 붉은 티셔츠를 입고 전 국민이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펼치던 응원의 함성(喊聲)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가 끝나고 2002년 8월에 인천광역시 교통국 대중교통과로 인사 발령 받고 공항 버스와 노선 신설 업무를 맡아 보게 되었다. 업무 중 기억나는 것은 남동공단 내 순환버스, 서구 불로동에서 계양역까지 운행하는 시내버스 노선 신설, 문학터널 개통 및 초지대교 건설에 따른 노선 조정, 좌석버스, 인천공항 운행버스 등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많은 고민도 했었고, 상사(上司)의 업무적인 주문이 많아 조금은 능력이 부족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03년 9월에 인천광역시 의회사무처에 인사 발령을 받아 의장 수행비서 업무와 특별위원회운영 등의 업무를 맡아서 의원 님들의 많은 요구사항을 처리했고 집행부와의 원만한 관계 역할과 의정 활동을 지원했었다.

3년 이상 의회에서 근무한 직원은 전보 조치한다는 인사 방침에 따라 2006년 8월에 기획관리실 혁신분권담당관실로 인사 발령을 받아 시책부서에서 업무를 맡게 되었다. 변화와 혁신 대 개혁을 요구하는 업무로 관련 전문도서(專門圖書)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조직 개편으로 균형발전담당관실로, 공기업민원담당관실로 조직 개편되면서 2008년 8월에 기획관리실 정책기획관실으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맡은 업무는 도시축전지원업무, 명품도시 지표개발 등의 업무를 맡아서 일하게 되었다. 도시축전업무는 인천의 최대 현안 업무로 전체적으로 조율(調律)하는 시의 지원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

2009년 2월에 사무관이 되어 수원에 있는 지방행정연수원에서 5주의 교육을 받고 2009년 4월에 정식 5급으로 승진하였다. 5급으로 승진하면서 2009년 5월 18일자로 남동구 구월3동장으로 인사 발령을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인천광역시 공직에 입문하여 걸어온 길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 결과 정말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1988년 4월에 공무원으로 첫 출발한 지도 벌써 22년이 훌쩍 지나갔다. 지방행정사무관으로 승진해서 구월3동장을 역임한지도 1년 7개월째다. 세월 흐르는 속도를 나이와 비슷하다고 농담으로 하는 말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나이 40대는 40km, 50대는 50km의 속도로 흘러간다는 얘기를……!

주민센터 동장으로는 구월3동이 처음이다. 의욕도 있고 승진의 신선함도 있어 처음에는 조금 의욕적으로 일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실 여건의 어려움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직원의 일할 의욕과 주민의 참여 등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인천시 승진(昇進)이 빨라서 남동구의 동기(同期)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구면(舊面)이 별로 없어서 일처리에 대한 어려움도 있는 것 같다.

최근 우리 공직자를 바라보는 주민의 눈, 공직자의 생각과 주민의 생각의 차이 등을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지난번 총리·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의 낙마(落馬)와 외교통상부장관의 딸 특채(特採) 관련한 파문 등 공직자가 국민의 존경을 받기는 커녕 국민의 지탄(指彈)을 받는 사례를 지켜보면서 우리 공직자들의 마음은 착잡할 수 밖에 없다. 위법행위에 대한 무감각과 공직자로서의 윤리의식의 마비(痲痺)에 대해 개탄(慨歎)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렇게 공직자에 대한 국민의 불신(不信)이 커간다면, 우리나라는 선진일류 국가·행복국가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최근‘정의(正義)란 무엇인가’라는 번역 책이 선풍(旋風)을 일으키고 있다. 대통령은‘공정한 사회’를 국정의 화두(話頭)로 제시하였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건전한 국민 상식으로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고위공직자의 빗나간 행태에 대해 비난이 빗발치는 현재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危機)가 아닐 수 없다. 근현대사에서 선진국에 진입한 비유럽 국가는 일본이 유일한데, 대한민국도 선진국 문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지난 50여년의 경제발전을 통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를 토대로 선진국에 제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국민소득이나 무역규모 등의 가시적인 지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더 나아가 세계에서 존경받는 문화국가(文化國家)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신뢰나 법치주의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간접자본을 튼튼하게 갖추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적 간접자본의 확충을 통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선봉(先鋒)에 서 있는 공직자의 자세가 제대로 되어있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이라는 양적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영혼과 윤리도덕이 그에 걸맞은 질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퇴화된 것은 아닌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선비의 기상과 정신적 유산(遺産)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며, 우리 공직자들이 중심을 잡고 공직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 다시금 생각할 때다. 내가 걸어온 공직의 길을 뒤돌아보면서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진정한 주민의 봉사자로서 정직하고 솔직하게 행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나의 진정한 행복이라 스스로 다짐해 본다.

글 : 박해보
 ※ 2010년 "소래나루"(남동구 공무원 문예동인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Posted by 남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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